Admin 
고산1리 신석기유적(濟州高山里先史遺蹟) 03-18 | VIEW : 6,098
고산리_자구내_유적발굴.jpg (125.8 KB), Down : 16
고산리_자구내_토기.jpg(461.7 KB), Down : 12




고산리 선사유적(濟州高山里先史遺蹟 = 新石器初期遺物散布地)
문화재 지정 ; 대한민국 사적 412호(1998년 12월 23일)
분류 ; 선사유적(신석기시대 초기) 유물산포지
면적 ; 99,121㎡
위치 ; 한경면 고산1리 3262, 3628번지. 속칭 '자구내 한장밭' 지역. 지금은 발굴 작업을 끝내고 다시 농사를 짓고 있어서 유물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

수월봉 앞 해안단구 대지에 넓게 형성되어 있는 신석기시대 전기의 선사유적이다. 신석기시대는 원시농경과 목축을 기반으로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인류문화 발달사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시기이다. 발굴 결과 나온 유물로는 석기 99,000여 점, 토기조각 1,000여 점이 있는데, 특히 원시형 적갈색 섬유질 토기조각은 독특한 토기형태로 고산리식 토기라고 불린다. 당시 사람들이 사용했던 유물 조합을 통해 후기 구석기 말엽의 수렵채집 집단이 석기 전통을 계승하며, 초보적인 형태의 토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짐작한다. 구석기 후기 문화에서 신석기 전기 문화로 옮겨가는 과정을 알 수 있고, 시베리아, 만주, 일본, 한반도 지역을 포함하는 동북아시아의 신석기 전기 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로서 중요한 유적이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제주대학교박물관 조사단(단장 이청규 교수)은 1994년 6월 16일부터 8월 18일까지 고산리 해안단구 속칭 한장밭 일대에서 융기문토기 1개체분을 비롯하여 원시무문토기 파편 50여점, 돌화살촉(Arrow) 206점, 돌날(Blade) 22점, 돌송곳 19점, 홈날석기(Notch), 끝긁개(end-scraper), 세형돌날(micro-blade), 첨두기(尖頭器;point) 박편 6114점 등 6500여점의 신석기초기시대 유물을 발굴하였다. 이 유적은 1988년 제주대학교 박물관의 강창화에 의해 융기문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유적이 위치한 곳은 제주도에서 보기 드문 너른 대지가 형성되어 있으면서 경작지가 조성되어 있고, 그 가운데로 자구내라는 하천이 흘러 차귀섬 앞의 포구로 빠진다. 자구내 북쪽으로 해발 148m의 분화구인 당산봉이 있고, 남쪽으로는 해발 65m인 수월봉이 있으며 그 사이로 발달된 20m이상 높이의 해안절벽을 형성하고 있다.  유적은 자구내 마을 서쪽 어귀에서 수월봉 바로 앞에 이르는 해안단구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 범위는 남북 700m, 동서 100m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나타난다.(한국이동통신제주지사, 제주의 문화유산. 19쪽)(※1만년전에는 고산 앞바다 수심 50m까지 육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음)

이 중 융기문토기(아래 사진)는 도내 최초로 발굴된 것이며, 강원도 오산리(鰲山里) 유적(기원전6000-4000)과 부산 동삼동(東三洞) 유적(기원전6000-5000)과 일본 쓰시마해안 지역 선사시대 유적지에서 출토되는 기하학적 태선융기문토기(太線隆起文土器)와 같은 형식이어서 당시 동북아 지역 문화권의 일면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화살촉 등 0.5-1cm 크기의 수렵용 석기도 오산리·동삼동·쓰시마·시베리아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석기처럼 신석기초기의 눌러떼기 수법을 계승하여 제작된 것으로 나타나 제주도-우리 나라 동남해안-쓰시마-시베리아로 연결되는 해양문화교류 상황을 짐작케 하고 있다. 원시무문토기 파편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초기 토기 형태로 비슷한 유형의 토기는 동삼동과 북한지방에서 약간씩 발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청규 교수는 '토기의 제작 방법 등으로 미루어 기원전 5천-3천년(1994. 9. 2. 한겨레신문에서는 기원전7000-4000년으로 보도하였음)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일정 규모 이상의 인구 집단이 오랜 기간 생활을 영위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고 하였고, 발굴 지역 주변 1만평 정도의 농경지에 더욱 중요한 유물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하였다.(제민일보, 4327. 8. 26, 8. 27.)  지금까지 우리 나라 역사학계에는 신석기초기시대가 역사의 공백시대로 남아 있었는데, 이곳에서 유물이 발굴됨으로써 역사의 공백기를 메울 수 있게 되었으며, 우리 나라 신석기 문화 여명기를 북쪽에서가 아니라 남쪽에서도 설명할 수 있는 자료가 제시된 것이다. 임효재 서울대 교수는 '고산리 유적은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불분명했던 우리 역사의 공백기를 해명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정형화된 한국 신석기 시작 이전의 것으로 고산리를 표준으로 한 〔고(古)신석기〕단계의 설정이 가능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제민일보, 4328. 3. 14.)

최근 1997년 전에 발굴했던 곳에서 남쪽으로 100여m쯤 되는 곳에 대한 발굴 작업이 다시 진행되었는데 이번에 밝혀진 출토 유물은 다음과 같다.


1)성형석기
석촉(arrow point)은 길이 3cm 내외의 것으로 석기의 가공면은 양면 2차가공 흔적이 뚜렷하다. 전면 2차 가공이 주류를 이루나 석기의 끝부분만 잔손질을 한 것도 있다. 전체 형태는 삼각형이고 중간 부분 횡단면은 삼각형에 가까운 능형과 렌즈형이 대부분이다.
창끝(point)은 첨두 부분 및 양쪽면에 잔손질을 했으며, 대부분 길이가 5cm 이내인 것으로 폭에 비해 길이가 2배 이상 되는 것이다. 전체적인 형태로 볼 때 나뭇잎형과 삼각형으로 양분되며 그 중에는 슴베가 달린 것도 있다.
긁개(scraper)는 양면2차가공이 아닌 평면2차가공으로 성형한 것이다. 따라서 작업날의 평면형태가 일정한 면을 이루게 된다.
양면석기(biface)는 길이 3cm 미만의 소형석기와 5cm 이상 되는 석기로 나누어진다. 대부분 소형양면석기이다. 이 석기의 하단부에는 양면가공 흔적이 뚜렷하다.
뚜르개(awl)는 드릴용으로, 이곳에서 발견되는 뚜르개의 대부분은 2차가공 흔적이 보이고 3개 이상의 능선의 각이 끝 부분에서 합일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새기개(burin)는 돌날 또는 박편의 한쪽 끝에 타격을 서로 엇갈리게 해서 얻은 이면으로 된 조각날을 형성한 형태이다.
자르개(knife)는 길이 5cm 내외의 삼각형, 사다리꼴, 직사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대부분 한쪽면에 타격을 가하거나 눌러떼기 수법으로 날을 만들었다. 다른 한 면은 손잡이가 수월하게 직각 형태를 하고 있다.
가공흔석기는 일정한 형태의 가공 형태는 보이지 않지만, 2차가공 흔적이 일부 베풀어져 있는 것들이다. 대부분 큰 석기들로 core로 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러한 석기들은 대부분 제작과정에 있는 석기들로 파악된다.
시병연마석기는 화살의 사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석기이다. 주로 초지나 늪지의 대나무과(갈대)에 속하는 나무를 화살대로 사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도구는 화살대의 거친 면을 갈면서 패인 홈으로 보인다.

2)세형돌날과 몸돌
돌날(blade)은 간접떼기인 돌날떼기에 의하여 떼어내진 것으로 길이가 너비의 2배가 되는 것들이 있다. 이곳의 돌날은 단면이 삼각형에 가깝고, 좌우 대칭되어 평행한 형태를 하고 있다. 고산리 출토 돌날은 대부분 2.5cm를 넘지 않는 세형돌날이다.
세형돌날몸돌(micro blade core)은 돌날을 떼어내기 위한 몸돌을 말한다. 대체로 고산리 돌날 몸돌의 제작기법은 타격면과 타격 방향을 기준으로 볼 때 자연면을 타격면으로 사용하고 양면떼기로 작은 배 모양의 형태를 만든 뒤 몸돌을 얻는 형식과 공기돌을 반듯이 쪼개어 둥글게 격자를 떼어낸 다음, 아주 작은 돌날을 얻는 방식 등 여러 가지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몸돌의 볻원 크기는 길이 5cm 이상이 거의 없으며 맨처음 떨어져 나간 기술격지도 길이 2cm 정도이다.

3)폐기석재
폐기석재란 석기를 만들 때 본래의 의도된 성형석기 외에 폐기되는 석재를 말한다.
고산리에서 발견되는 박편(flake)은 크게 석기 제작을 위한 재료로 사용된 비교적 큰 편에 속하는 박편과 잔손질로 인해 떨어져 나간 박편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산리 출토 박편들은 비교적 소형으로 크기가 3cm 내외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박편은 박리면의 형상에 따라 폭에 비해 길이가 큰 박편과 폭이 길이와 비슷하거나 작은 박편들로 세분된다.
석편(spall)은 아무런 2차가공 흔적이 없는 것들로서, 석기를 제작할 때 박편과 함께 떨어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

4)토기
고산리 출토 토기는 모두 비짐형태가 대부분 엉성한 원시형 토기이다. 이 토기는 토기 전면에 그은 것이라기보다는 가는 풀잎이나 식물 줄기 같은 것을 넣어 성형한 것들이다. 즉 이러한 식물이 불에 타 없어지면서 빠져나간 흔적이 뚜렷한 토기들로, 이는 사질점토와 식물태토보강제를 혼합한 토기라고 볼 수 있다. 기형은 평저의 직립구연이나 약간 내반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일부는 구순부가 밖으로 돌출된 형태도 확인된다. 아직 기형이 완전하게 복원된 토기는 없지만 그릇의 높이가 20cm 정도인 발형토기, 혹은 심발형토기로 추정된다. (제주고산리유적 100∼103쪽)

 PREV :   금등리 손도물당(본향당)
 NEXT :   회수동 알성(남문성)
 LIST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