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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수동 알성(남문성) 03-12 | VIEW : 9,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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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서귀포시 회수동 471-6번지 일대 박암우 댁 울담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방어유적(성)

중문면 중산간마을인 회수리(廻水里, 약 60호)는 속칭 '도래물'이라고 부른다. 4·3 당시 회수리 인근에는 대포리에 속한 '동수동'과 '어둔모르'가 있었다. 이들 두 마을은 1948년 초토화시기에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동수동 주민 약 20호는 회수리로 소개되어 현재 회수동과 한 마을이 되었고, 어둔모르는 대포동에 속하게 되었다.
4·3 당시 회수리는 중산간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소개당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토벌대가 이 마을을 토벌작전의 중간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거나 아니면 토벌대의 거점인 중문리를 방어하기 위한 필요(방패막이)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은 당시 송문옥 구장 덕에 소개를 면했다고 기억한다. 송구장이 마을 주민들에게 "토벌대가 와도 도망치지 말고 뭉쳐 있어야 산다."며 독려했고, 마을에 들어선 군인들 앞에 나서서 "내가 이 마을의 책임자요, 향후 마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전적으로 내가 책임을 지겠소." 하며 군인들과 협상을 벌여 소개를 막았다는 것이다.
소개를 면한 회수리는 1948년 11월 중순부터 마을 주위에 가시를 두르고 보초를 섰다. 그러나 이런 수단으로는 더 이상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회수 주민들은 1949년초부터 본격적으로 축성을 시작했다. 회수리 주민들과 이미 이 마을에 소개되어 있던 동수동 주민들도 같이 성을 쌓았다. 內城과 外城 즉 이중성이었다. 내성은 높이 3m, 폭 2m로 쌓았고, 외성은 12자(3.6m) 높이에 폭 2m로 쌓았다. 동서남북으로 문을 설치했고, 보초막을 12개나 두었으며 내성에는 회곽도를 만들어 민보단과 경찰이 순찰을 돌았다. 현재는 남문과 북문이 있었던 곳에만 성담의 일부가 남아 있다.(제주4·3유적Ⅱ 247~248쪽)
회수동 마을 아래쪽에 있다고 해서 '알성', 또는 남문이 있던 곳이라 해서 '남문성'이라 부른다. 높이 1.5~2m, 폭 1~1.5m로 길이가 30여m 남아 있다. 성이 있던 곳을 회수에서 중문으로 가는 도로가 통과하게 되어 끊긴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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