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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1동 강창보·강창거 생가 03-04 | VIEW :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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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주소 ; 제주면 용담리 69번지
현재 주소 : 제주시 용담1동 69번지(비룡길7-1)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위인선현유적(생가)

제주도에서 신인회와 조선공산당 등에 참여하여 활동한 강창보가 살았던 곳이다. 강창보(1902-1945)는 1902년에 강제원의 장남으로 제주도 제주면 용담리 69번지에서 태어나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益) 문하생으로 한문을 배웠다.
상경하여 청년학관 및 사립 중동(中東)학교에서 중등 과정을 수학(修學)하였다. 청년학관을 다닐 무렵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1919년의 3·1 운동에 자극되어 제주도내 신진 엘리트들에 의해 1921년 반역자구락부를 비밀리에 조직할 때 창립 멤버로 항일 청소년 활동을 시작하고, 1923년 소년선봉대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으로 그 지도에 임하였으며 제주소년연맹의 집행위원, 또 청년동맹에 가입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4년 귀향하여 1925년 3월 11일 제주시내 급진적인 청년들(송종현·김택수)과 함께 신인회(新人會)를 결성하고 송종현과 함께 교양부 간사를 맡아 활동했다. 신인회는 제주도에서 최초의 사상단체였다. 그 강령으로 〈무산자를 본위로 신사회의 건설〉을 표방하였다. 1925년 4월에는 전국적 사회주의단체인 조선사회운동자동맹(朝鮮社會運動者同盟)에 참가하여 일제 식민통치로 인한 민족 모순, 계급모순 해결을 위한 사회주의운동에 전념하였다. 일제는 신인회의 강령이 불온하다고 하여 1925년 4월 17일 검거하였다. 동년 9월 동지 김택수(金澤銖, 일도), 송종현(宋鍾炫, 신촌)과 함께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에 1926년에는 신인회를 발전적으로 해소하여 청년동맹을 결성하는 데 주역으로 활약하였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 제주지회 조직에 힘썼다. 동년 8월에는 송종현·김택수·장종식(張鍾植)·오대진(吳大進)·김정로(金正魯)·윤석원(尹錫沅)·김병원(金炳媛) 등 조선공산당의 세포로 활동하다 1927년 8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는 제주에서 일어난 공산주의운동의 시작이었다. 한국에서 1925년의 조선공산당 창건에 이르기까지 민족주의 운동이건 사회주의 운동이건 자산층(資産層)에 속하는 민족 인텔리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제주도내에 있어서도 초기 공산주의 운동자들은 거의 가정이 부유층·지식층에 속하고 그런 환경에서 성장한 신진 엘리트라는 사실이다. 강창보도 사립 중동(中東)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송종현의 권유로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들은 항일 민족해방운동의 한 방편으로 이 길을 택한 것일 뿐 무산자가 자본가를 타도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28년 9월에는 제주도청년연합회 서무부 상무위원 및 집행위원으로 있으면서 제4차 조선공산당재건사건으로 경기도에서 검거되어 1930년 12월에 소위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아 미결기간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1년 1월 출옥 후에도 제주도에서 그의 당 재건 활동은 비밀리에 계속 되었다. 제주읍 부태환(夫泰煥)의 집에서 제주지역 주요 사회주의자들과 ‘제주도사회주의운동자간담회’를 가지며, 조직원을 확보하고 사회주의 운동에 다시 뛰어들었다. 동년 5월에는 청년동맹(靑年同盟) 출신 신재홍(申才弘)·이익우(李益雨)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를 결성하고 그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제주야체이카는 사회 각 부면의 청년·여성·노동자그룹 등 제운동단체를 지도하는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며, 이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이익우(李益雨:한림), 신재홍(申才弘:우도), 오대진(吳大進:모슬포) 등 급진적인 항일 동지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동년 9월에는 제주지역에서 세금불납운동, 묘목강제배포 반대운동 등 농민운동을 주도하다가 1931년 11월부터는 세 차례에 걸쳐 일제강점기 어업 노동자의 투쟁 가운데 가장 조직적이고 대규모인 해녀항일투쟁을 지도하였다.
해녀 항일 운동의 후견 단체 혁우동맹(革友同盟)의 실제적인 지도자로 지목되어 1932년 5월 2일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 책임자로 검거되었으나 5월 6일 오전 2시경 유치장을 극적으로 탈출한 후 서귀포 이도백(李道伯)의 집에 은신하였다. 거지·엿장수·미치광이 등으로 변장하며 다니다가 강병희의 도움으로 짐짝 속에 감추어져 복목환(伏木丸) 편에 일본 오사카로 탈출하였다. 강병희는 제주읍 삼양(三陽)리 태생으로 건입(健入)리에서 동아통항(東亞通航)조합 제주도출장소장으로 일하며, 제주와 오사카(大阪)의 정기여객선 복목환(伏木丸)에 관계하고 있었다. 강병희는 5월 21일 오후 7시경 산남 서귀포에서 몰래 강창보를 만나 탈출 요청을 받아 이날 오후 10시경 서귀포항 방파제(防波堤) 근처에서 빈 가마니 속에 강창보를 숨기고 끈으로 묶어 "복목환 김일성(金一成)"이라고 적어 한 개의 해산물 짐짝같이 포장하였다. 동 선원 한숙도(韓淑度) 외 2명에게 이를 인도하여 5월 26일 일본 오사카(大阪)항으로 상륙하게 하여 도주시켰다. 일본 순경은 짐짝을 검사하면서도 이를 발견 못하고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고 한다.
후일 이 일이 탄로되어 강병희는 구속되고 1932년 9월 15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유죄판결을 받자 공소 신청, 1932년 10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법 제 103조에 의하여 징역 8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당시의 증언에 의하면 재판장이 준엄하게 꾸짖자 '재판장께서는 친구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까! 진정한 우정은 친구가 곤경에 처할 때 자기 몸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친구 강창보군의 어려운 처지를 도와준 데 대하여 조금도 후회가 없습니다. 응당 상응한 처벌은 이미 각오했습니다.'라고 하니 재판장은 말문이 막혔다고 전한다.
탈출한 강창보는 몰래 도쿄에 들어가 송성철(宋性徹), 김여환(金麗煥) 등과 비밀 접촉, 일본공산당과 연계하여 전일본 노동조합 전국협의회(약칭 全協) 토건 노조의 노동 운동에 참가하면서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한 그는 1939년 조선문제시국연구회(朝鮮問題時局硏究會)를 조직하고, 《조선신문》발간을 지도하였다.
한편,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개시, 운동의 근거지를 흥남(興南)의 조선 질소비료 공장, 고주파(高周波) 공장, 국경 철도, 세관(稅關) 등 주요 공장과 기관 노동자에 대해 오르구 침투 공작을 진행하였다. 1943년 4월 국내로 들어오려다 도쿄에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44년 3월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대전(大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1월 7일 오전10시30분 옥중순국(獄中殉國)하였다. 재판 당시(1944년) 주거는 동경시 농야천구(濃野川區) 농야천정(濃野川町) 1716번지이며, 당시 직업은 고물상이라고 되어 있다.
해방을 몇 달 남겨 두고 파란만장한 혁명가의 생애를 마감하자 스승 김석익(金錫翼)은 「제강창보문(祭姜昌輔文:강창보를 제사하는 글」을 지었다. 그 글 일부에 '身作獄中之魂而父母妻子 又從以散亡流離已矣乎 天耶人耶 是孰使之然哉兮 其必曰 "我自取之又何悲"嗚呼 天飜而地覆兮 此心之憤 其誰知之' 즉 '몸은 옥중의 혼이 되고 부모 처자는 따로 흩어졌네. 이게 하늘이 한 일인가! 사람이 한 짓인가! 뉘가 그로 하여금 이렇게 되게 하였소. 그는 바로 "내 스스로 그 길은 취했습니다. 어찌 슬퍼하십니까."라고, 아! 하늘이 꺼지고 땅이 뒤덮이네! 이 분통한 마음 그 뉘 알아주리!'
강창보는 김문준(金文準), 김시용(金時容) 등과 함께 공산주의자로 민족 해방 운동에 기꺼이 몸을 던졌던 제주가 낳은 삼대거목(三大巨木)중 한 사람이다. 강창보의 부인 김윤성(金允聲:도두)은 1980년 제주시 영평(寧坪)동 소재 양로원에서 이승을 뜨니 누구 한 사람 이 노인이 위대한 혁명가의 아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07년 1월 우리 고장 출신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제주항일기념관)
강창보의 집터는 현대식 2층 건물이 들어서 있어 당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제주항일독립운동사,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제주항일인사실기, 제주인물대사전)

※강창보를 살리려던 강병희는 조국이 해방되자 1946년 1월 "서울 조련(朝聯) 연락위원"의 상무일을 맡게 되었다. 이는 재일 조선인연맹 부위원장 김민화(金民化:조천) 등 4명이 귀국하여 조직한 것이다. 또 강병희는 일제의 경찰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던 한을 품고 제주 출신 총독부 고등경찰 김석묵(金錫黙)을 돌로 쳐서 죽였다고 전한다. 김은 일본식 이름으로 시바다겐지(柴田健次)라 하여 우리 애국지사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는데 특히 조선어학회 사건 때에 악명(惡名)이 높았다. 강병희는 1958년 북한에서 사망하였다고 전한다.

※강창거(姜昌擧, 1910.9.16.~2004.11.17.) 지사는 강제원의 아들이며 강창보의 동생이다. 가명은 강양일(姜良一), 김치정(金致楨), 이재환(李在煥)이다. 1920년대 후반 제주농업학교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동맹휴학을 주도하며 항일학생운동을 전개하였다.
제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25년 4월 제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하였다. 1926년 6월 제주공립농업학교에 재학 중 일본인교사 야나기다 히코지[柳田彦二]의 한국인 차별 및 부당한 교육에 항거하여 동맹휴학을 전개하다가 퇴학당하였다. 같은 해 서울에서 경성사립중앙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재학 중 1927년 동맹휴교 투쟁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일시 구속되기도 했다.
그는 평소 일제 식민통치의 모순과 부당성에 대한 저항의식이 높았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과학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1929년 1월에는 학생운동단체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朝鮮學生科學硏究會)에 가입하는 한편 동년 3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여 활동을 전개해 갔다.
1929년 7월 양정고등보통학교 교정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를 비판하는 모임을 갖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0년 9월부터 1931년 1월까지 전라남도 목포에서 제주기선상회 사무원으로 근무하였고, 1930년 5월 다시 서울로 갔다. 1931년 6월 중순경 정관진의 지도 하에 서울 창신동에서 경성세염회사 노동조합의 인계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1931년 7월 상순경에는 3~4회에 걸쳐 서울에 있는 양정고등보통학교 교정에서 학생들에게 사회주의 사상과 일제 지배 타도를 역설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1932년 3월 김기범(金基範)·강위황(姜渭璜)과 함께 체포되었다.
1932년 9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34년 9월 만기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살았다.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 동대문구에서 살다가 1947년 2월 23일 좌익 세력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지부를 결성하였고, 1949년 말경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일본 오사카시에 안장되어 있던 선생의 유해는 2006년 9월 25일 국군의장병의 운구 행렬에 맞춰 인천공항 국제선 입국장을 통해 봉환되어 운구차량 편으로 국립대전현충원 봉안관에 도착하여 동월 26일 중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한 신혁희, 중국 지린(吉林)성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원재룡,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박도백의 유해와 함께 국립대전현충원에 합동 안장되었다. 제주도보훈청과 광복회제주도지부는 공동으로 2007년 9월 우리고장 출신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강창거(姜昌擧)는 일본에서 71세의 노구로 형수의 소식이나 들었는지! 만일 형수의 부음(訃音)을 들었다고 한들 당시 조국은 살벌하고 차가운 시절이라 맞아드리기에는 인색하였을 것이다.
《작성 19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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